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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Bay of Cows Invasion

1. 개요2. 배경3. 문제점4. 결과5. 후폭풍

1. 개요 [편집]

해변에 상륙한 놈들의 목을 벌써 따버린 것이나 다름없소.
You just cut the throats of everybody on the beach down there.

커티스 르메이, 당시 공군 참모총장.[1]
1996년 4월 15일 피델 성베르트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루이나의 지원 하에 반공 게릴라가 벌인 상륙작전. 콜마르에 모인 고랜드 망명자들을 군사기지에서 훈련시켜 고랜드에 상륙해 이들을 통한 게릴라전과 항공 지원으로 성베르트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본래 계획과 달리 지나치게 많은 기관들이 개입하고 필요 이상의 군사력 투입으로 인해 단순히 소규모 부대들을 통한 게릴라전이 아니라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상륙작전으로 전개되었고 지형과 항공 지원의 부재, 현지의 정보 부족과 민심[2]같은 여러 사항들로 인해 루이나 군사 역사상 가장 참혹히 끝난 작전들 중 하나이자 첩보 및 공작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남았다.

2. 배경 [편집]

캘러핸 정권 말기인 1992년 3월 대통령실과 NIA에 의해 브루투스라는 작전명으로 계획되었다. 콜마르에 거주하던 약 1,500여 명의 고랜드 망명자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해 명칭을 "2506여단(Brigade 2506)"이라고 짓고 친루이나 정권이 있었던 빌베른 모처에 위치한 비밀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다만 그 해 5월에 발생한 E-3격추사건으로 인해 캘러핸은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브루투스 작전에 대한 실행 의욕을 잃었다. 때문에 당시 국무총리였던 닉슨이 작전을 진행하였으나 이미 임기 말이 다가와 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캘러핸 정부가 끝나고 신임 대통령으로 존 F. 캘러핸이 당선되며 훈련 중이던 1,500여 명의 게릴라는 그대로 작살 나는가 싶었으나 이 작전은 NIA뿐만 아니라 국무부와 국방부까지 개입되었다. 지금까지 쓴 비용과 끌어모은 전력을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페어팩스는 외교적 위험 부담이 큰 이 작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노회한 인상의 전임 대통령 캘러핸에 비해 무언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송이 같다는 평가[3]를 단번에 떨칠 정도의 탁월한 업적을 쌓아 올리고 싶었던 페어팩스는 고랜드에 침공군이 상륙하면 고랜드 국내의 호응이 있을 것이란 NIA의 호언장담만 믿고 작전을 승인했다.

사실 배경은 또 하나 더 있다. 카우스만 침공이 1961년 4월에 시작되었는데 그 해 3월에는 군부에서 더 정신 나간 작전인 노스우즈 작전을 올린 것이다. 페어팩스 입장에서는 노스우즈 작전보다는 차라리 카우스만 침공 쪽이 훨씬 제정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3. 문제점 [편집]

하지만 작전은 처음부터 산재한 위험 요소와 갖은 문제점들이 많았다. 작전이 갓 세워질 때는 소규모 요원들을 야간에 몰래 투입한다고 계획되었으나, 작전에 간섭하는 목소리가 많아지다 보니 소규모 잠입이 사전 폭격을 동반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불어났다.[4]

그래도 여기까지는 차라리 문제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후 계획이 진행되며 점점 보안이 허술해졌고, 작전의 정교함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작전 몇 개월 전에는 루이나 타임스가 고랜드에 대한 군사 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NIA 국장은 "수 개월 내에 고랜드의 공산정권은 무너질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올렸다. 이 외에도 작전의 사전준비랍시고 소규모 게릴라를 끊임없이 고랜드에 침투시켜 사보타주 공작을 벌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고랜드 혁명정권에게 힌트를 주는 격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고랜드 혁명정권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전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 실제로 피델 성베르트는 계속된 루이나의 위협으로 인해 의심의 눈초리를 곤두세우며 전 병력을 동원해 해안선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정치적 제약이 심했다. 어디 반란군도 아니고 엄연한 주권국가인 고랜드를 루이나가 공격한다는 모양새를 내보일 수는 없으니 모두가 루이나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공 게릴라들은 해외로 도망간 고랜드 망명자들이 주도하고 이를 '익명의 후원자들'이 도와주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때문에 무기도 고랜드군 흉내를 냈고 부대 역시 고랜드 망명자가 주도[5]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덕분에 장비의 제한도 많았고 작전도 어려웠다.

지리적인 제약도 있었다. 카우스만은 고랜드의 수도 아바나와는 직선거리 40km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서 상륙에는 최적지였으나 그만큼 경계도 삼엄했다. 또 상륙지와 재집결 지역 사이에는 광활한 늪지대가 있어 사실상 병력 재집결이 불가능했다. 초기의 소규모 병력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연대 병력에 육박하는 상륙부대에겐 큰 문제였다. 하지만 작전 추진자들은 이를 간과하고 작전을 진행해 결국 상륙부대는 늪지에 갇혀 꼼짝도 못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 결과 [편집]

작전은 15일 새벽 은폐를 위해 국적 마크를 지운 A-26 공격기[6]들이 고랜드 공군기지들을 공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은폐를 했든 안 했든 어쨌건 간에 루이나군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 되는 고랜드 공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계획했던 2차 폭격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미 1차 공격을 가했는데 한 번 폭격한 공격기가 바로 보급을 마치고 재차 폭격을 가하면 뒤에 루이나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7] 뒤에 루이나가 있는 것은 전세계가 다 알았지만 일단 눈 가리고 아웅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는 심각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는 상륙군에게 루이나 공군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중 지원을 할 준비를 했지만 작전 하루 전에 취소되었다. 보고를 들은 후 길 패트릭 국방차관[8]에게 한 말이 바로 문서 맨 위의 인용문이다.

나름 준비와 각오를 마친 성베르트와 고랜드 정부는 전면전을 선포해 전군을 물론 자국 국민들에게까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반정부 성향을 지닌 인사 약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루이나의 계획대로라면 카우스만 침공과 더불어 반정부 인사들의 폭동이 벌어져야 했지만 성베르트와 사비에트 비밀경찰의 주도 하에 훈련을 받은 고랜드 내무부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사전에 차단당했다.

17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상륙부대는 카우스만에 상륙을 시작했다. 고랜드군은 상륙부대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고 최정예 공수부대와 T-34-85 20대로 이루어진 전차 대대를 선봉에 세워 반격해 곧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상륙해오는 부대도 1년 이상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부대들이라 고랜드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나[9] 10배가 넘어가는 병력의 차를 어쩔 수는 없었고, 루이나 공군과 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명령 전달이 늦어지면서 오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앞서 언급한 이유로 못 온 것도 있다. 정치적 이유로 후속 지원이 계획상에서 틀어졌고 상황 판단 미비로 계획의 융통성 있는 변경이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에 고랜드 공군은 공습에서 살아남거나 피해를 입은 비행기들을 긁어모아 최대한 빠르게 수리하여 출격시켰다. 고랜드 공군은 중화기를 실은 수송선을 폭격하여 격침시켰고 이로써 전세는 완전히 고랜드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2506여단은 10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10] 성베르트 정부는 재판을 통해 주동자들을 처형했고 루이나는 5,300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을 지불하고 나서야 나머지 1,113명의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이전에 체포되었던 반정부 인사들도 덤으로 숙청당했다.

훗날 2506여단을 기리기 위해 콜마르시에 피그만 전시관[11]이 건립되었다.

5. 후폭풍 [편집]

침공으로부터 4달이 지난 1961년 8월 유고랜드에서 열린 남랜드 경제회의에 참석한 성베르트는 회담장에서 만난 페어팩스 보좌관 리처드 굿윈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페어팩스에게 전해 주라는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침공을 당하기 이전에 고랜드 혁명은 약했으나, 지금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고맙다."

이 사건이 끝나고 나서 성베르트는 라디오에서 몇 시간 동안 분노 + 희열에 가득 찬 연설을 했다. 또 카우스만 침공의 후폭풍으로 사비에트에서 훈련받은 고랜드 정보부는 반정부 인사들 대다수를 루이나의 침공을 인도한 앞잡이라는 명목으로 모가지를 날려 버렸다.

이 이후 성베르트는 정권에 위협을 느껴 소련에 SOS를 쳤는데, 이렇게 해서 일어난 사건은 고랜드 한 나라의 문제를 넘어 세계구급의 문제로 번졌다.
[1] 후술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준비하던 2차 지원폭격이 취소되자 한 말이다.[2] 당연히 게릴라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선 현지의 정보와 민심을 통한 대중 호응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NIA는 고랜드가 과거 사비에트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망각한 상태로 성베르트 정권 치하의 고랜드를 완전한 파탄국가로 판단했고 고랜드 전역에 반공 게릴라가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대로 성베르트 정권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계획대로 소규모 병력을 통한 게릴라 전투였다고 해도 오래가지 않아 현실처럼 참혹히 끝났을 것이다.[3] 페어팩스는 2차 랜드대전을 참전해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훈장도 받은 인물이지만 바로 전임인 캘러핸은 원수이자 연합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인지라 그에 비하면 애송이나 다름없었기에 국내로나 대외적으로나 냉전시기 지도자로서 강인한 모습을 보여줄 한 방이 필요했다.[4] 본래 국방부는 루이나군 정규군(육해공 모두)까지 동원하려 했다. 이것만큼은 너무 모양새가 안 좋고 티가 난다는 이유로 페어팩스가 막았다.[5] 다만 비행, 항해, 폭파 등의 전문 기술이나 전투능력 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루이나인 교관들이 함께 참전했고 이 사람들이 고랜드에 잡혀서 결국 루이나는 굴욕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6] 이 기체는 당시 고랜드군의 주력기이기도 했는데 고랜드에 친루이나 정권이 들어섰을 때 도입된 것이다.[7] 애초에 NIA가 구상했던 스토리 설정은 '성베르트 정권에 반기를 품고 있던 고랜드 공군 내의 반체제 인사들이 자국 군시설을 폭격하고 루이나에 귀순한다' 는 것이었다. 작전에 사용할 항공기로 많고 많은 폭격기 중에 하필 A-26 공격기를 고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런 '망명자'들이 탄 군용기가 루이나에 귀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재무장하고 다시 폭격에 나선다면 모양새가 너무 이상하다는 것.[8] 맥도날드는 부재중이었다.[9] 공식적인 발표로는 전사자 170여 명이지만 사상자를 포함한 수는 발표되지 않았다.[10] 고랜드 군인들 사이에 몰래 숨어서 탈출하려던 단원도 있었지만 그가 껌을 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장교에게 잡혔다.[11] 다른 이름으로는 2506 여단 전시관(Brigade 2506 Museum).